1차 발굴결과

발굴경위

중국 하이난성 삼아시 조선촌에는 1945년 고립된 일본군이 조선인 1,000여 명을 동원하여 인근 산에 굴을 파고 군수물자를 숨긴 흔적이 남아있다. 이후 일본인들은 소전인들로 하여금 또 다른 굴을 파게하고 칼로 무자비하게 그들을 살해하여 파 묻었는데 이 곳을 오늘날 '천인갱'이라 한다. 이곳 천인갱 발굴 조사는 해남도에서 농업투자를 하고 있는 신우농업주식회사의 후원과 MBC 문화방송의 3.1절 특집프로그램 제작을 위해 이루어 졌다.

조사단 구성

충북대학교 중원 문화연구소 유해 발굴 센터 연구원 2명 외

조사원              임나혁(충북대학교 고고미술사학과 조교)
                         우은진(충북대학교 유해발굴 센터 조교)


조사보조원       배원일(충북대학교 고고미술사학과 4학년)

조사기간

2001년 1월 11일부터 1월 18일까지

조사지역과 조사방법

조사지역은 하이난성 삼아시 근교의 하이난섬 원주민 마을의 공동묘지 일대 약 만 제곱 미터정도의 구역이다. 이 구역은 토착민들에 의해 조선 촌으로 불리는 곳으로 서쪽에서 동쪽으로 완만하게 흐르는 경사 지형이지만 평지에 가까운 곳으로서 작은 잡목들이 자라고 있는 공터이다. 소로길 바로 옆에 있으나 경작에 의해 지형변화는 크게 없으며, 사질토인 이 일대는 수박을 재배했던 밭으로 이용되었지만, 최근에는 공터로 남겨져 있었다. 
이 중 조사는 지난 98년 시굴 조사가 이루어진 지역을 중심으로 유해매장의 가능성이 가장 큰 약100㎡의 지역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조사를 위해 유해매장 추정지역을 남북방향으로 150m, 동서 방향으로 16m 범위로 설정하고 여기에서 가로 10m, 세로 8m 간격으로 다시 GRID를 선정하였다. 따라서 전체 GRID는 모두 여덟 개로 여기에서 유해발굴 작업을 실시했다.

조사내용

유해는 발굴이 이루어진 여덟 개의 칸 중 여섯 칸에서 출토되었는데 인골은 대개 40~50cm 정도의 깊이에서 발굴되었다. 보존상태는 당시 기후가 건기임을 고려해볼 때 날씨가 매우 건조하여 지표 노출 이후 파손이 심각하게 우려될 정도였으며 머리 방향은 모두 동쪽을 향하고 있다. 유해는 총 35구가 출토되었는데 이 중에는 개인 사물함 용도로 이용되었을 것으로 보이는 관물대와 수첩 일부, 단추, 철사 끈 등의 유품이 함께 나온 유해도 있다.
특히 이곳에서는 이에 보철을 하고 있는 유해가 많이 발굴되었는데 이 지역에 살고 있는 현지 원주민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에 유난히 보철한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또 보철 모양도 하트모양에서 사각형까지 비교적 다양하며 보철재료도 은과 금이 함께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DNA sample (총 4구)
북동쪽 2칸(NE2)에서 출토된 유해 2구 - femur, teeth
북서쪽 2칸(NW2)에서 출토된 유해 2구 - femur, teeth

(1) 북동쪽 1칸 (NE1)
모두 여섯 개체로 추정되는 유해가 출토되었으나 2구를 제외하고는 보존상태가 몹시 나쁘고 나이 들을 추정할 수 없다. 비교적 보존상태가 좋은 2구 중 한 구에서는 개인사물함 용도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이는 관물대가 뒷머리 쪽에서 유해와 함께 출토되었다. 이 외에 일본군대가 조선보국대에 나누어준 것으로 추정되는 복무 수첩과 흰색 사기 단추 등이 나왔다. 현장에서 계측한 유해의 키는 170cm 정도로 추정된다. 여기에서 출토된 완전 유해 2구는 보존처리 후 유리관에 넣어 현재 납골당에 안치 중이다.

(2) 북동쪽 2칸(NE2)
완전 유해 5개체가 출토되었다. 출토 당시의 상태는 유해가 비교적 온전한 형태를 이루고 있었으나 지표에서 노출하자마자 뼈가 쉽게 부러질 정도로 많이 상해있었다. 이렇게 뼈의 상태가 좋지 않은데는 당시 증언자의 증언대로 일본인이 유해를 불에 태운 후 묻었기 때문으로 짐작된다. 또 실제로 뼈를 불에 태워 묻은 흔적이 불 먹은 흙과 머리뼈, 이에 뚜렷이 남아있어서 당시의 참혹했던 상황을 짐작해 볼 수 있다. 현장에서 계측한 유해의 키는 대략 165cm~170cm 정도로 추정된다.

(3) 북서쪽 1칸(NW1)
모두 10개체의 유해가 나왔으나 이 중 완전한 형태를 이루고 있는 유해의 수는 적다. 머리뼈 일부와 위팔뼈 조각들이 주로 출토되었으며 한 구의 유해는 아래 사지 뼈만 출토되기도 했다. 또 머리뼈 2구가 겹쳐서 출토된 것으로 보아 유해를 마구 겹쳐 매장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4) 북서쪽 2칸(NW2)
모두 3개체로 추정되는 유해가 출토되었으나 머리뼈 일부와 위 사지 뼈 일부만이 확인되었다. 여기에서 출토된 아래턱의 이는 불에 탄 흔적이 뚜렷이 보인다.

(5) 남서쪽 1칸(SW1)
모두 6개체의 유해가 출토되었으나 아래 사지 뼈만 나온 것이 대부분이다. 이 중 한 구의 유해에서는 개인사물함으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이는 관물대가 허벅지 뼈 옆에서 유해와 함께 출토되었고 또 한 구의 유해에서는 정강이뼈 아래쪽에서 못이 함께 나와 관이 사용된 유해가 있지 않을까 하는 의문을 품게 한다.

(6) 남동쪽 2칸(SE2)
모두 4개체로 추정되는 유해가 출토되었으나 보존상태가 좋지 않다. 불에 탄 흔적이 뼈에 뚜렷이 남아있으며 이 중 한 구의 유해에서는 흰색 사기질의 단추가 생전에 입었던 옷에 있었던 모양 그대로 출토되기도 했다.

결론

삼아시 조선촌 발굴결과 가로 150m, 세로 20m 범위의 지역에서 총 35구의 유해가 발굴되었다. 유해는 지표에서 비교적 낮은 위치인 40~50cm 정도의 깊이에 묻혔으며 유해의 머리 방향이 모두 동쪽을 향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인위적으로 묻힌 것임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이번 발굴 결과를 고려해 볼 때 조선촌 전체면적을 발굴한다면 상당한 양의 유해가 출토될 것으로 생각된다.

문제제기

조사가 너무 짧은 시간에 이루어져 단지 매장 여부와 그 대강의 상황만을 확인한 데 그쳐 인골의 주인공이 조선인인지의 확실한 여부를 확인할 수 없었다. 그러나 태평양전쟁 말기 이 지역 근처에 일본군대가 주둔하였으며 많은 수의 조선인들이 노역에 혹사당했다는 증언과 근처에서 살해되었다는 현지 여족 주민들의 일관된 증언은 상당한 신빙성이 있는 자료라고 생각된다. 따라서 이 지역에 대한 인류학적 발굴조사와 이런 사실들을 뒷받침해 줄 문헌 자료 (일본 방위청에서 소장하고 있는 당시 군대에 관한 기록 등)의 조사가 함께 진행되어 이들이 누구인지를 밝히려는 노력이 정부와 관련 단체 및 학자들에 의해 계속 이루어져야 하겠다. 그리고 유품 중 개인 사물함으로 이용되었을 것으로 보이는 관물대에서 나온 조선인 복무 수첩은 일부이긴 하지만 그 기록이 남아있어서 당시 조선 보국대의 역할과 더불어 넓게는 한일관계까지 다소나마 짐작해 볼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될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므로 이에 대한 한일관계자의 협조가 절실하다고 하겠다. 또, 앞으로 발굴 이후 유해의 보존처리 및 납골당 안치계획에 대한 관련 학자들 간의 폭넓은 토론의 장이 하루빨리 마련되어 더 이상의 유해 파괴 행위가 일어나지 않아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발굴을 마치면서…

 난 2001년 겨울, 중국에서도 가장 끝에 있는 해남도라는 섬에서 강제징용자를 발굴하는 데 참여하게 되었다. 
 해남도에서 내가 느낀 발굴의 세계는 또 다른 겸손함과 신성함을 갖게 하기에 충분했다. 나름대로는 발굴을 꽤 오래 해 왔다고 자신해 온 나였지만 그곳에서 본 모습은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 없는 광경이었다.
 
공 ·동·묘·지... 

 한마디로 얼른 표현하기에 지금 이 한마디 외에 다른 말은 떠오르지 않는다. 더운 날에 지금껏 삽질을 열심히 한 보람이 헛되지 않았는지 유해는 한꺼번에 꽤 많은 수가 나왔는데 모두 한결같이 머리를 동쪽으로 두고 나란히 누워있었다. 
 내 머리는 굳어버렸지만 내 가슴은 그때 다른 어떤 순간보다도 더 세차게 뛰고 있었다. 그 순간 전쟁은 참 많은 사람들을 가슴 아프게 할 수밖에 없는 것이구나 하는 생각을 짧게나마 가져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또 며칠이 지나 돌아가신 분들의 넋을 기리고자 하는 위령제가 현장에서 열렸다.
 그러한 일련의 행사를 지켜보면서 그 시간 그 자리에 모인 각자의 사람들 모두 나름대로의 느낌은 달랐겠지만, 가슴 속 마지막 끝 언저리에 품은 마음은 모두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렇게 세찬 모래바람이 휘몰아치던 날의 위령제도 끝났지만 발굴 작업은 계속되었다. 발굴이 계속될수록 점점 더 화가 났다. 모든 것에 대해서, 정확히 누구에 대해서 어떤 것에 대해서 화내야 할지 모르겠지만 점점 더 가슴이 부글부글 끓어오를 정도로 화가 났다. 그리고 어깨가 무거워졌다. 
 내가 할 수 있는 부분이 너무 작기도 했지만 너무나 많은 부분들이 더 필요하고 이를 위해 더 많은 사람,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리라 생각했기 때문에…

 그러한 나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시간은 흘러 1월 18일 발굴 작업이 종료되기까지 총 35구의 유해가 발굴되었다. 모두 머리를 동쪽 방향으로 두고 있었으며 한결같이 불에 탄 흔적이 남아있는 상태 그대로…

 떠나는 그 순간까지 해남도 조선촌에서 느꼈던 내 생각들과 내 감정들을 다 정리할 수는 없었다.
 그건 내가 지금 돌아와 이 글을 쓰면서도, 아니 어쩌면 영원히 다 정리되지 못할 숙제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만리타국에서 쓸쓸히 강제노역에 쓰러져 간 조선촌 징용자의 넋두리가 내 뇌리 속에 박혀 이 곳 고국 땅에 왔는지도 모를 일이리라.

<  2001년 2월의 첫날에…  > 유해발굴센터 연구원 우은진